1. 서울시 테마산책길 탐사

광혜원(廣惠院,)

청정촌 2014. 7. 4. 22:41

 

광혜원(廣惠院, Widespread Relief House)

 

광혜원은 1885년 4월 10일에 설립된 한반도 최초 근대식 의료 기관이자 의학 교육기관이다.

같은 해 4월 26일 濟衆院(제중원)으로 개칭하였다.

 

설립[편집]

 

1885년(고종 22년) 갑신정변 때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치명상이 될 만한 자상(刺傷)을 입은 사건이

벌어지자 고종이 민영익을 치료할 의원을 찾던 중 미합중국 북장로교선교사이자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공부한 의사였던 호러스 뉴턴

앨런이 나타나 민영익을 살렸다.

 

서양 의학에 관심한 고종은 앨런을 궁정 시의관으로서 임명하고 4월 10일 한성부의 齋洞(재동)에 서양식 근대 의료 기관인 廣惠院(광혜원)을 설립하게 윤허하였다.

광혜원은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소속됐고 광혜원장은 廣惠院堂郞(광혜원당랑)으로서 불렸다.

광혜원은 같은 해 4월 26일(음력 3월 12일) 濟衆院(제중원)으로 개칭했다.

 

앨런의 의학교 설립 계획은 제중원이 개원하고서 반년이 지난 1885년 12월에 시작됐다. 앨런은 이 문제를 포크와 의논했다.

당시 의학교 설립 계획은 정가나 외교가에 상당히 알려진 상태였고 고종도 알게 되었다.

고종은 의학교 설립에 매우 좋게 반응했고 조지 포크에게 일 추진을 요청했다.

아울러 화학, 물리, 해부에 필요한 의료 기구 구입비로 250달러를 지급했다.

 

의학교는 육영공원과 달리 정식으로 고용할 인물을 미합중국에 따로 부탁하기보다는 이미 있던 의료 인력인 앨런과 헤론과 선교사로 입국해 활동하던 언더우드를 위촉해 해결하고자 했다.

1886년 2월 8일 외아문이 팔도 감영에 내린 관문에 따르면, 인재를 광구하고자 각도에 학도 3명에서 4명씩을 할당했고 지벌을 따지지 않고

14세에서 18세의 총명한 청년을 발탁하고자 했다.

 

이듬해인 1886년 3월 29일에는 제중원의학교를 개교해 양반 자제 중에서 선발한 학생 16명 중 12명이 본과에 진급했는데 이것을 한국 근대 의학 교육 시초로 간주한다. (이 제1회 졸업생 중에는 백정 출신인 박서양신창희, 김희영, 홍종은, 김필순, 홍석후가 있었다.)[8]

1887년 재동에서 한성 남부의 동현[9]로 이전했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

 

1893년에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의 의과대학교 교수였던 올리버 에비슨이 광혜원을 인수받았다.

에비슨은 1899년 미합중국 클리블랜드시의 사업가인 세브란스 L. H. Severamce에게서 거액을 기증받아 숭례문 밖 복숭아골현 서울역앞

연세재단 빌딩 터에 세브란스 병원을 신축하고 의학 교육기관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교명을 1909년에 사립 "세브란스의학교"로, 1913년에 설립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각각 개칭했고 1917년에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발전했으나 1942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교명을 "아사히의학전문학교 (旭醫學專門學校)"로 개칭했다.

해방 후 1947년에는 문교부에게 6년제 "세브란스 의과대학"으로 인가받았다.

연세대학교로 통합

세브란스 의과대학일제 강점기부터 같은 미합중국계 개신교 학교인 연희전문학교와 인연이 깊어, 에비슨이 두 학교장을 겸임하는 등 교류가 잦았다.

오랜 논의와 준비 끝에 1955년 5월 25일에는 신촌동 현재 위치에 새 세브란스 병원 건물을 착공했고 1957년 1월 5일에 결국 양교가 통합해

양교명에서 첫자를 딴 연세대학교로 명명했다.

연세대학교정 내에 있는 '연세 역사의 뜰'에는 광혜원 건물 중 하나가 복원돼 광혜원과 세브란스 병원 관련 사료가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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