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겸재그림속 도보여행

#D02. 사직동, 인왕산기슭 도보

청정촌 2016. 1. 4. 00:35

<겸재 정선그림의 그곳 답사>

필운대 : <장동팔경첩> 중, 1750년대,  29.5x33.7cm, 간송미술관 소장

인왕산 남쪽 기슭에 있는 필운대 언덕을 그린 그림이다. 필운대는 전망이 좋았고 선비들이 시회를 즐겼던 공간으로 유명하다.

필운대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白沙) 이항복(1566-1618)의 집이 있던 자리이다.

원래는 권율장군의 집이었는데 무남독녀 외딸을 둔 권율은 사위인 백사에게 이 집을 물려주었다.

좌우로 북악과 남산을 비슷한 거리에 두고, 정면으로는 낙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배화여고뒤 필운동 9번지에는 이항복이 쓴 ‘필운대(弼雲臺)’ 석 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  

옆에는 1873년(고종 10년)에 이항복의 9대손인 이유원(李裕元, 1814~88)이 찾아와 조상을 생각하며 지었던 한시가 새겨져 있다.

1873년은 최익현의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이유원이 영의정에 임명된 해인데, 날짜는 없다.

      조상님 예전 사시던 곳에 후손이 찾아오니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 흰 구름만 깊었구나.
      백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유풍(遺風)은 가시지 않아
      부로(父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필운상화 : 지본담채, 18.5 x 27.5cm, 개인소장

인왕산 동쪽 산자락 가장 높은 봉우리를 필운대라고 하며, 지금의 종로구 누상동 낙하동 일대이다.

필운대에 선비들이 모여 앉아 한양의 명승을 감상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왕산 아래에서 서울 시내 쪽을 내려다 본 모습으로 우뚝 솟은 남산이 보이고 산자락 끝으로 남대문의 모습도 보인다..

 

수성동() : <장동팔경첩> 중,  제작연도 미상, 33.7 x 29.5cm, 간송미술관 소장.

시내물과 암석의 경치가 빼어났던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을 사실대로 묘사한 그림이다.

수성동 계곡에는 안평대군(1418~1453)이 살던 비해당터와 기린교로 추정되는 다리가 있다.

 

2010년 10월 21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여름철에 모여 휴양을 즐기던 계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의 「수성동」에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장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과 청운동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수성동 계곡은 지금은 철거되고 없어진 종로구 옥인동의 옥인아파트 자리에 복원된 계곡이다.

계곡의 길이는 약 190m이고, 폭은 4.8∼26.2m이다. 하류에는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돌다리 1기가 남아 있다.

수성동은 종로구 옥인동과 누상동의 경계에 자리한 인왕산 아래의 첫 번째 계곡으로, 조선시대에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리게 되었다.

수성동의 ‘동(洞)’은 지금 사용되는 도시의 행정단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 또는 계곡을 의미한다.

 

인곡정사 : <퇴우이선생진적첩> 중, 1749년, 보물 제585호, 지본수묵, 32.3 x 22.0cm, 모암문고

이 그림은 청풍계(淸風溪)에 기거하시던 겸재의 외조부 박자진(朴自振)이 사시던 외가집 풍계유택(楓溪遺宅)으로부터 이황과 송시열

두 선생의 친필묵보를 전해 받아 이 묵보를 수장하고 있는 겸재 자신의 집, 인곡정사(仁谷精舍)을 그린 그림으로 자신의 집 표현이

상세하게 되어있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에 겸재(謙齊) 정선(鄭敾)이 71세 때 그린 인곡정사도(仁谷精舍圖)에 죽마고우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이 7언 절구 제시(題詩)를 썼다. 과연 시문(詩文)의 대가다운 명시이다.

 

집 뒤 인곡에 우거진 노송(老松)이 숲을 이루고 있어 그 풍광이 빼어나니 제시로 '비취색 소나무 숲과 세 구멍 퉁소 소리가 나는 대밭

속에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의 두선생의 글은 후생들이 응당 서둘러 배울 일이요 중국 당나라 화성인 왕유(王維)의 별장이 있는

망천(輞川) 같은 곳에서 초본을 위한 4폭 그림은 다른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왕유(王維) 옹(翁) 같은 겸재 정선의

작품이라네.' 라고 기록하였다.

  

수성구지(壽城舊址) : 지본수묵, 53.0 x 87.1cm, 국립중앙박물관

수성구지는 궁궐여인들의 내불당(內佛堂)이었던 인수(仁壽).자수원(慈壽院)의 옛터로 짐작되는 곳을 그린 그림이다.

궁궐과 관아에서 일하는 서리나 별감 등이 많이 사는 당시 웃대마을의 모습과 가옥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1616년(광해군 8) 큰 영향을 미쳤던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인왕산 밑 옥인동 일대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광해군은 자신의 장래에 위협을 느끼고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 그러나 결국 광해군은 쫓겨났고,

자수궁도 1623년(인조 1) 헐렸다. 그 후 자수궁 자리에는 자수원()으로 개명된 이원()을 두었다.

 

자수원은 한때 5,000여 명의 여승()을 수용하는 국내 최대의 승방이 되었는데, 그 후 폐단이 심하다 하여 1661년(현종 2) 2월

부제학 유계() 등의 상계()로 폐지되었다.

 

인곡유거 : <경교명승첩>하권 중, 영조31년(1755)경,  지본담채, 27.4 x 27.4cm, 간송미술관

인곡유거는 '인왕곡에 있는 자신의 그윽한 집'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집의 평화로운 운치를 잘 표현하였다.

정선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태어나 지방 벼슬살이를 제외하면 평생을 살았는데, 이 작풉이 만년의 거처를 표현한 것이다.

우측 하단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맑은 바람을 쐬면서 앞에 펼쳐진 책을 읽고 있는 인물은 바로 정선 자신일 것이다.

 

바깥 사랑방 동쪽 문을 활짝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겸재 자신의 모습을 표현해 인곡유거인 것을 나타냈지만 사실 이 그림을 그린 의도는

사랑채 앞 정원과 그 남쪽으로 전개되는 필운대(弼雲臺) 일대의 인왕산 자락이 어우러지는 그윽한 자연미의 표출일 것이다.

뜰 안의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산봉우리들과 어우러지면서 이뤄내는 조화가 바로 이를 말해주는데 이엉을 얹은 초가지붕의

일각대문과 버드나무를 타고 올라간 포도덩굴에 이르면 그 세련된 안목에 기가 질린다.

 

인곡유거가 있던 자리는 옥인동 20 부근이다. 지금은 그 터에 군인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인곡유거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당시 겸재 댁 주소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도(漢都)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창의리(彰義里) 인왕곡(仁王谷).

그러니 인곡은 인왕곡의 준말이었던 것이다. 옥인동이라는 현 동명도 1914년 옥류동(玉流洞)과 인왕곡이 합쳐져 붙은 이름이다.

  

겸재가 살던 시대에 사대부의 집들은 모두 택호(宅號)를 가지고 있었다.

겸재도 52세부터 살기 시작해 84세로 돌아갈 때까지 살았던 인왕산 골짜기의 자기집 이름을 인곡유거 또는 인곡정사라고 불렀다.

유거라는 것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 집이란 의미이고 정사는 심신을 연마하며 학문을 전수하는 집이란 뜻이다.

모두 학문 연구를 궁극의 목표로 삼던 사대부들이 붙일 만한 집의 이름이다.

그래서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즐겨 유거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겸재의 스승인 삼연 김창흡이 태어난 집도 악록유거(岳麓幽居)였다.

삼연의 증조부 청음 김상헌이 붙인 이름이다.

 

인왕제색 : 1751년, 국보 제216호, 지본수묵, 79.2 x 138.2cm, 삼성미술관 리움

겸재가 76세 되던 해인 영조 27년(1751) 윤 5월 하순에 그린 작품.

<금강전도>와 더불어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왕제색도>는 여름날 소나기가 내린 후 육상궁 뒤편 북악산

줄기의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인왕산을 그린 것으로, 비가 개이는 인왕산을 장쾌하고 호탕한 필묵법으로 그려낸 만년의 걸작이다.

구도는 화면 가득히 배치하여 조화경으로 표현해 내었고, 넓은 묵면과 부드럽고 성글게 구사된 남종화법이 대비적으로 조화를 이룬

정선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친구 이병연을 위해 그린 그림이다.

친구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병마를 극복하길 기원하는 마음을 화폭에 담았다.

하지만 그의 친구는 그림이 완성된 지 5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우뚝우뚝 솟은 바윗덩어리, 막 피어오르는 물안개, 물에 흠뻑 젖은 소나무들, 바위를 타고 콸콸 쏟아져 내리는 물…….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림 아래쪽엔 이병연의 단아한 집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풍계유택 : <퇴우이선생진적첩> 중, 1746년, 지본수묵, 32.3 x 22.0cm, 개인소장

인왕산 청풍계에 있던 정선의 외조부 박자진의 저택그림이다.

그의 외가는 청풍계에서 제법 알아주는 집안이었고,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정선의 가정을 돌보아 주었다.

정선은 붓을 들어 그 외조부에 대한 감사함과 그리움을 담아 표현하였다.

 

청휘각 (晴暉閣) : 국립

청휘각은 현재 옥인동 47번지 근처에 있던 정자이다.

현재 정자는 사라지고  정자가 있던 곳에  겸재 정선의 <청휘각> 그림을 새긴 안내판이 서있다.

청휘각은 17세기 말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이 집 후원에 세운 정자였다. 청휘각은 비갠 뒤 맑은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집이란 뜻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손자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청음이 살던 궁정동 2번지 무속헌(無俗軒)에서

출생하여, 벼슬이 높아지면서 안국동과 옥류동에 저택을 마련한다.

옥류동 저택의 사랑채는 육청헌(六靑軒)이고, 후원의 정자가 청휘각(晴暉閣)이다.

 

숙종 원년(1674) 갑인 예송에서 서인들은 남인에게 패하여 정권을 빼앗겼는데, 숙종 6(1680)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7년만에

다시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되찼았다. 이때 문곡 김수항이 영의정이 되고, 김창집은 39세에 사간원 헌납, 김창협은 36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된다. 이 해에 문곡 김수항은 육청헌의 후원에 청휘각을 지었다.

이후 큰 비에 쓸려 나가자, 둘째아들 농암 김창협이 숙종12(1686)에 다시 지었다. 겸재 나이 그때 11세 때의 일이다.

겸재(1676~1759)는 스승인 삼연(三淵) 김창흡, 농암 김창협, 노가재(老稼齋) 김창업을 찾아 뵙기 위해서 자주 이 청휘각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동팔경(壯洞八景)을 그리면서, 이 청휘각을 포함시켰을 것이다.

더구나, 문곡 김수항은 그림을 잘 그리던 넷째 아들 노가재 김창업에게 이 청휘각을 물려주었기 때문에, 겸재가 52세때 근처 옥류동의

인곡정사로 이사를 왔었을 때는 노가재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겸재는 70대 중반, 영조 31(1755)경에 이 청휘각 그림을 그렸다.

 

뒷날 청휘각 일대에는 중인출신 위항시인 천수경(千壽慶, ?~1818)이 살았고, 김수항의 7대손 김병기(金炳冀,1818~1875)가 이 청휘각을

다시 중수하며, 지은 상량문에 층층 벼랑에 파서 세웟는데 그 앞에 개울을 끌여들여 네모난 못을 만들었다고 적고 잇다.

고종 연간에는 민태호(閔台鎬,1834~1884)와 민규호(閔奎鎬,1836~1878)의 형제가 살았고, 1910년 이후에는 친일파 윤덕영(尹德榮,)

별장이 있었다. 윤덕영의 벽수산장은 해방후 유엔군 숙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청풍계 : 1739년, 견본담채, 133.0 x 58.8cm, 간송미술관

청풍계는 인왕산 동쪽 기슭 현재의 청운동 54번지 일대의 골짜기를 그린 작품으로, 조선 후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안동 김씨의

세거지였다. 정선이 64세인 1739년에 그린 것을 보이며, 그가 그린 많은 <청풍계도>중 크기와 완성도 면에서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정선은 안동 김씨의 후원을 크게 받았으며, 정선의 외가도 부근에 있어 근처의 풍광을 자주 그려 <풍계유택>을 그리기도 했다.

 

당시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아서 靑風溪라 불렀으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이 별장을 이곳에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람이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의 淸風溪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청풍계가 있던 곳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남아있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끝났다.

청풍계의 제일 윗쪽에는 현대 정주영 회장이 1958년부터 40년 넘게 살던 집이 위치한다.   

 

세심대(洗心臺) : 공 아트

세심대는 마음을 씻는다는 뜻으로, 경복궁 서쪽인 종로구 신교동 서울농학교 뒤편 선희궁 위쪽에 있는 정자다.

여기에 겸재의 <한양전경>이 전시되여 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마른 붓처럼 꼿꼿이 선 나목과 남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조는 매년 이곳에 오르며 60세가 넘는 신하에겐 지팡이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세심대(洗心臺)를 읊은 시다

"洗心臺賞春 庚辰

인왕산이 비스듬히 세심대를 끼고 있어 / 仁王斜抱洗心臺
님 수레가 일년 일차 꽃구경을 오셨다네 / 玉輦看花歲一廻
구름이 산을 막아 그대로 막차이고 / 雲擁翠微開幕次
꽃시내를 흐르는 물 술잔 띄우기 알맞아 / 水流芳澖汎觴杯
고요한 이빈의 궁 드문드문 버들이요 / 李嬪宮靜垂疎柳
깊숙한 서씨 정원 매화가 비쳤었지 / 徐氏園深映遠梅
독보라는 휘호를 지척에서 하시면서 / 咫尺揮毫稱獨步
몇 번이고 님께서 이 비재를 인정했는데 / 幾回天語獎菲才


 -여름날 흥풀이[夏日遣興] 8수, 다산시문집

 

한양전경(漢陽全景 /三勝眺望) : 서원아회(서원아회)첩 중, 1740년, 견본담채, 66.7 x 39.7cm, 모암문고

정선이 65세 때 이춘제의 정자인 삼승정(三勝亭)을 낙성한 기념으로 그린 것이다.

삼승조망(三勝眺望)이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은 원래 <옥동척강도>, <서원소정도>와 같은 화첩에 속헤 있던 것이다. 

화면 왼쪽 하단에는 삼승정이 보이고 주인공인 이춘제가  멀리 펄쳐진 한양의 전경을 조망하고 있다.

 

사직동, 인왕산기슭 도보코스(약7km)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 - 사직동 - 배화여고(필운대) - 백호정 - 박노수미술관 - 수성동계곡 - 불국사 - 군인이파트 - 서울교회 -

              - 청휘각터 - 구름다리 - 청운공원 -  서시정 - 윤동주 문학관 - 자하문로 - 청풍백세 - 서울청운초등 -  서울농학교 - 

              -  통인시장 - 경복궁역


***단축코스(약4km)

3호선 경복궁역 1번출구 - 사직동 - 배화여고(필운대) - 백호정 - 박노수미술관 - 수성동계곡 - 불국사 - 군인이파트 - 통인시장 -

              - 통의우체국 - 백송터 - 국립고궁박물관 -  경복궁역

 

 

 

 

 

 

 

 

 

 

 

 

 

 

 

 

 

 

 

 

 

 

 

 

 

 

 

 

 

 

 

 

 

 

 

 

 

 

 

 

 

 

 

 

 

 

 

 

 

 

 

 

 

 

 

 

 

 

 

 

 

 

 

 

 

 

 

 

 

 

 

 

 

 

 

 

 

 

 

 

 

 

 

 

 

 

 

 

 

 

 

 

 

 

 

 

 

 

 

 

 

 

 

 

 

 

 

♬ 가고파/ 해방둥이 연주곡